거상 아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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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밖에서는 이미 폭정에 지칠 대로 지쳐 원성이 드높아진 백성들이 국왕의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차투랑가는 기세를 꺾어 버리기 위해 시위 주동자를 잡아다가 본보기로 처형했지만 오히려 시위대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 왕국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번졌고, 그러자 이번엔 군대를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해산시켜버렸다. 하지만 해산 과정에서 힘없는 아이들까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백성들은 폭발하고 말았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백성들은 마침내 무기나 농기구를 들고 왕국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왕국 군대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분노는 불처럼 번져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지만 차투랑가는 백성들에게 조금의 양보나 타협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왕국친위대까지 동원하여 진압하였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무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왕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시민군을 이끄는 지도자 중에는 아스완(Aswa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상인 집안 출신으로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클레이언 뿐만 아니라 왕국 밖 야만인들과도 거래를 하면서 커다란 부를 일궈온 거상이었다. 또한 그는 엘람이 밝혀낸 이세계 통로의 경제적 가치를 일찌감치 꿰뚫어보고 녹스 위에 세워진 주요 요새들을 차지한 초기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취급하는 물건들 중에는 클레이언 사회에서 보기 힘든 변방 부족의 공예품이나 특산품이 많았는데, 개성을 추구하는 방계 왕족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진 덕분에 리케이온 왕족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상업적인 재능과는 별개로 아스완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로 상인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동료들은 친형제보다도 끈끈한 신뢰로 뭉쳐 있었다. 심지어 어떤 야만인 부족은 거래를 요구하는 아스완에게 상단에서 중요한 사람을 자신들에게 일정 기간 볼모로 보내야 한다는 조건을 걸기도 했는데, 아스완의 동료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자식을 인질로 내어주었다. 그런 아스완이 차투랑가 국왕의 폭정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을 때, 상단의 동료들은 아스완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몸을 던졌고 그들의 모습은 마치 결사대와 같았다.
이미 중앙 권력에서 멀찌감치 밀려나 있던 수많은 리케이온 왕족들 또한 오히려 차투랑가가 아닌 아스완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는데, 이것이 아스완이 다른 시민군 지도자와는 달랐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왕국 전역에서 각개격파 당한 시민군 패잔병들은 많은 왕족들이 지지한다는 명분이 있는 아스완의 밑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병력이 점점 늘어난 아스완은 어느덧 시민군 전체를 이끄는 최고 지도자가 되어있었다.
내전은 점차 차투랑가와 아스완 두 세력 간의 싸움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어느 쪽도 우세하다고 할 수 없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며, 왕국은 지난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