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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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세상의 절반은 공허였고 나머지 절반은 바다였다. 바다는 옆으로는 무한히 넓었으며 아래로는 바닥이 닿지 않았다. 바다에서 스스로 태어난 여신 아르케(Arche)는 자신 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을 시간조차 잴 수 없는 오랜 세월동안 홀로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혼자라는 고독감에 몹시 지쳐버린 아르케는 피조물들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스스로 분열하여 이그니스(Ignis)라는 형제를 만들었고 그와 혼인하여 바다 속에 거대한 용암덩어리를 출산했다. 용암이 폭발하듯 수면 위로 터져 나온 뒤 서서히 식으면서 거대한 땅덩어리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하란(Harran)대륙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대륙의 무게 때문에 차원이 뒤틀리면서 공허 너머에 어둠으로 가득 찬 또 다른 공간이 생겨났는데, 아르케는 이곳을 마계 미탄니(Mitanni)라고 불렀으며 이그니스에게 ‘죽음’이나 ‘무질서’와 같은 세상의 어두운 부산물들을 보관하고 통치하도록 했다.
하란 대륙 위에는 점차 수많은 생명체들이 탄생하고 번성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특정 생물종들이 생태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바로 클레이언(Klayan)이라 불리는 인간류의 종족이었다. 그들은 대륙 중앙을 흐르는 카데시(Qadesh)강을 따라 유역 곳곳에 씨족단위로 마을을 세웠고, 창조주인 아르케를 숭배하면서 원시적인 문명권을 이루었다. 아직 클레이언들은 대륙에 넘쳐나는 더 크고 흉포한 괴수들에게 여전히 잡아 먹힐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종족 특유의 끈기와 지능으로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면서 그들의 문명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클레이언 역시 천성이 욕심이 많고 파괴를 일삼는 종족이었다. 비록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보이는 동물은 닥치는 대로 수렵했고, 근처의 숲은 죄다 불을 질러 농지를 만들었으며, 광물을 캐내기 위해 산맥 곳곳을 한도 끝도 없이 파헤쳤다. 그들은 광물 중에서도 특히 크리스탈에 집착했는데 크리스탈은 영롱한 빛을 낼 뿐만 아니라 생명체를 원형의 순수한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신비로운 힘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노화와 죽음을 늦추고 싶었던 클레이언 부족 지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크리스탈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광맥이 있다고 알려진 산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곡괭이를 들고 달려드는 통에 여지없이 황폐화되기 일쑤였다.
이렇듯 클레이언들은 생존 과정에서 여러 생물종을 멸종시켰고 자연의 균형을 흐트러트렸으며 이로 인해 점차 대륙의 기후까지 바뀌면서 온갖 자연재해가 속출하게 되었다. 클레이언 스스로 초래한 재해 때문에 농사도 걸핏하면 흉작이 들어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그들의 사회는 더욱 지옥처럼 변해갔다. 그나마 적게라도 수확한 식량마저 힘 있는 자들이 빼앗으며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점점 줄어드는 물자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동족들끼리 전쟁을 벌여 살육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처참하게 망가져가는 하란 대륙을 지켜보며 근심이 쌓인 이그니스는 이대로 세상을 방치하지 말고 직접 통제해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아르케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아르케는 아무 대답 없이 이 모든 불행을 그저 묵묵히 지켜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