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전쟁, 하르마게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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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니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르케의 미온적인 태도에 크게 실망한 그는 아르케를 몰아내고 자신이 주신이 되어 부조리로 가득 찬 세계를 정화하기로 결심했다. 이그니스는 미탄니에 갇힌 망자의 영혼을 모아 11명의 사도를 만들어 냈고, 마침내 아르케를 향해 공격을 시작하면서 신들의 전쟁 하르마게돈(Harmagedon)을 일으켰다.
하늘에서 신들의 무기가 서로 부딪히자 그 소리가 천지를 울렸고, 그 충격의 여파로 하란 대륙에서는 땅이 흔들렸으며 산에서 다시 용암이 터져 나왔다. 이그니스가 혼신의 힘으로 내리친 공격을 아르케가 피하면서 그의 무기가 대륙 위를 강타했고, 이 공격으로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지진이 일어나 대륙에 거대한 틈 ‘하란의 흉터(Harran’s Scars)’가 생겼다. 그리고 이그니스의 무기가 찍혔던 곳은 그 무시무시한 힘 때문에 차원까지 비틀어지며 마계 미탄니와 이어지는 통로를 만들어버렸다.
이로 인해 이그니스에게 복종하던 수많은 마계인들이 ‘하란의 흉터’를 통해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보이는 모든 생물을 무차별 학살하였고, 이 생명들의 영혼을 전부 이그니스에게 제물로 바치며 그와 11사도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아르케 역시 쉽게 무너질 존재가 아니었으나, 마계인들이 계속해서 제물을 바치는 통에 이그니스는 점점 더 강력해져 갔고 과연 아르케가 언제까지 이그니스를 막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한편 대륙이 갈라지는 큰 지진에 이어, 생전 처음보는 마계인들의 침략과 학살로 혼란에 빠진 클레이언들은 곧 이 사태가 천상에서 벌어지는 신들의 전쟁의 여파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한 클레이언 부족들은 서로 간의 적대행위를 멈췄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최초로 클레이언의 모든 부족장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아르케의 패배는 곧 모든 클레이언들의 몰살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지도자들은 고심 끝에 모든 클레이언들이 아르케의 편에 서서 하르마게돈에 참전하기로 결의했다.
클레이언들은 단합하여 마계인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고 두 세력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신체적 조건이 마족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기에 수많은 클레이언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으며 자칫 이 전쟁으로 클레이언은 전멸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까지 감돌았다. 하지만 클레이언들은 종족 특유의 끈기를 발휘해 마족의 공격을 계속해서 버티면서 불리했던 전황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클레이언들은 모두가 각자 다양한 방면으로 전쟁에 기여했다. 누군가는 직접 무기를 휘둘렀고, 누군가는 무기 자원을 채굴했으며, 누군가는 군량을 생산했다. 실로 대륙의 모든 클레이언들이 참전한 총력전이었던 것이다.
튼튼한 보급과 유능한 지도자들의 전략 아래 승기는 점차 클레이언 쪽으로 기울었고, 계속되는 패배에 전의를 잃은 마족들은 마침내 마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클레이언들은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마족들을 완전히 전멸시키기 위해 ‘하란의 흉터’까지 추격해 들어갔지만, 그 안에서 마족들은 이미 모두 마계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마계 미탄니는 하란 대륙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였기 때문에 클레이언의 육신으로는 그 이상은 쫓아갈 수 없었다.
비록 완전히 씨를 말리진 못했지만 마족의 후퇴시킴으로써 이그니스 군단이 더 이상 영혼의 제물을 받지 못하게 하자, 이그니스의 사도들은 점차 영력을 잃고 아르케에게 소멸 당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들의 전쟁에서의 주도권은 이제 아르케가 쥐게 되었다. 하지만 아르케가 그동안 이그니스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넘겨주었기에 그녀 혼자서는 이그니스를 완전히 끝장낼 힘이 없었다. 이그니스가 불리해진 와중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아르케에게 저항하며 하르마게돈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이어졌고, 그의 몸부림이 자연재해를 일으켜 그 피해를 클레이언들이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했다.
이에 각 분야에서 부족들을 지휘했던 27인의 클레이언 영웅들은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들이 희생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들은 열흘 동안 대륙 북부를 향해 종단하고 다시 열흘 동안 구름보다 높은 산을 등반하는 대장정 끝에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땅인 흰독수리 산맥의 정상에 올랐다. 산 꼭대기에는 거대한 용암호수가 끓고 있었으며, 27인의 영웅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 속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용암에 불타고 녹아버린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웅들의 영혼은 곧장 하늘로 올라가 아르케와 싸우고 있는 이그니스에게 전부 달려들었다. 영웅들은 이그니스가 지칠 때까지 달라붙어 마침내 이그니스를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하는 것에 성공했고, 그러는 사이에 아르케는 압그룬트(Abgrund)라고 하는 영원의 구덩이를 열었다. 아르케는 옴짝달싹 못하는 이그니스와 영웅들의 영혼까지 전부 그대로 심연의 깊은 곳으로 떨어뜨렸고 압그룬트를 봉인함으로써 신들의 전쟁은 비로소 종결되었다.